사과와 용서 진지한 이야기

우리는 왠지 모르게 먼저 사과를 하지 않으려 드는 경향이 있다. 되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사태 앞에서도 뻔뻔하게 목소리를 높이라고 아이에게 가르친다. 지는 것을 싫어해서 그럴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지는 것이라고 여겨서일까. 차사고라도 났다 하면 주위를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놀랄만큼 큰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목소리 작으면 질세라 서로 바락바락 목청을 높여 네놈이 잘못했노라고 악을 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심정적으로 대단히 어렵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이 한국민이라는 족속은 사과라는 것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관대하다. 술에 취했다는 것이 모든 일에 대해 면책사유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사자가 어떤 행동으로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든, '사과를 했다'고 한다면 광복절특사라도 되는 양 그 책임을 크게 묻지 않는다. 어떤 종교의 교리 마냥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노라- 라는 선언은 마치 면죄부와 같다. 하지만 사과했으니 용서해주겠다 내지는 사과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당연하게 얘기/요구하는 말들의 이면에 중대한 논리의 비약이 있다는 걸 파악하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그것은 잠시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문제다. 음주운전으로 애꿎은 보행자를 치어죽인 운전자가 경찰서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참회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던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한다고 해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제대로 알고,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귀결을 불러왔는가 낱낱이 파악하고, 그 귀결로 누가 어떠한 피해를 입었는지 소상히 알아내어, 그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최선을 다해 보상하고, 그 이후에도 죄의식을 내팽개치지 않은 채 자신으로 인해 괴로웠던 이들을 기억하며 한평생 겸허하게 산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이 할퀴어댄 누군가의 생채기가 긁힌 흔적조차 없는 뽀얀 새 살결로 바뀌는가? 상처에 새살이 돋으면 그것은 흉터로 남을 뿐 결코 이전의 매끄러운 살결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건, 엎어져 무릎팍이 까져본 어린 시절에도 배운다.


얼마전에 썼던 글의 주인장은 현재 이글루스에서 다른 곳으로 블로그를 옮겼다. 지금 그 곳은 아무것도, 적어도 1년은 두고두고 읽을 수 있겠다 싶어 칠칠맞게 기뻐했던 글 중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장판마저 깔끔히 걷어버린 빈 방에는 당시에 남겨져 있던 '이사의 이유'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자신 또한 비주류의 매니아임을 자처하면서도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인을 겁없이 매도하던 비겁한 자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자신이 이겼노라 낄낄대면서 상대를 조롱하던 비열함의 기록 또한 남아있지 않다. 이에 화가 난 주인장이 정식으로 대응하겠노라 으름장을 놓았을 때는 조롱하던 포스트를 후닥닥 지웠고, 주인장에게 사과의 덧글을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에 모든 트랙백/덧글을 차단해 둔 채로 사과문을 올려두었으며, 피해자는 이글루스를 떠났고 가해자는 멀쩡히 이곳에 남았다.

어느덧 일주일이 넘었는데, 나는 왜 아직도 이를 잊지 못하고 있는가.

간단하다. 나는 저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에게 사과하노라- 고 글에 써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 타인의 생각을 좌빨이라 싸잡아 욕하던 당사자가 정작 다양성의 축복을 향유하고 있는 모습에 분노한다.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노라 말하면서 그에 대한 그 어떤 비판과 질책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귀를 꼭 틀어막고 있는 작태에 분개한다. 고작 일주일,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건만, 정작 가해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신의 일기를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면 심지어 증오의 감정이 솟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장 나를 분노케 하는 것은, 정작 자신이 다양성의 축복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대함에 있어 단순히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다양성을 무참히 짓밟는 언행을 수차례 반복한 점이다.

SK의 인수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이글루스의 강점이라면, 사용자들의 의식 그 바닥에 깔려있는 소수(minority)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공감의 베이스다. 사용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게임매니아, 오타쿠, 동인인(男/女)임을 밝히는 데 스스럼이 없고, 그를 이유로 해 타인을 비난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다양성의 인식이 이글루스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뿌리깊게 박혀 있다. 내가 가해자의 이글루를 들러보고 경악한 부분은, 그(혹은 그녀)의 취미 또한 이글루스의 다양성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종류, 즉 직장상사나 교수 그리고 부모 앞에서 떳떳하게 밝히기 꺼려지는 그러한 종류라는 점이다. 그렇게 자신은 개성을 존중해주는 다양성의 참호에서 나오지 않은 채로 타인의 개성을 무참한 말과 글로써 기관총질했다는 사실의 확인 앞에서 나는 그만 아찔해졌다.

물론 자신의 글로 인해 타인을 상처입혀놓고 그 언행을 지워 책임을 피하려 드는 비겁함과 '잘못은 했지만 꾸중은 안들을 거에요'라고 귀틀어막고서 앵앵대는 소아병적인 사고방식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다른 무엇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니가 하면 불륜, 너만 나쁜 놈'식의 저 가증스러운 이중잣대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하라는 것이냐고?

간단하다. Undo it.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원상복구해놔라는 거다. 그럼 저 모든 비열함, 비겁함, 가증스러움의 기억도 사라질테고, 피해자의 상처도 없었던 일이 될테고, 사라진 이글루의 모든 글이 복구될테고, 나는 그에 다시 행복해질 것이다.

불가능하지 않냐고?

그래,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고작 사과한다는 말 한마디로 당신의 모든 행패가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는가? 혹시나 착각했을까 싶어 다시 강조하는데, 피해자의 마지막 멘트는 '사과를 받아들인다.'였지 '당신을 용서한다.'가 아니었음을 상기하라. 더욱이 나는 뉘우침을 읽을 수 없는 귀틀어막은 사과 따위에는 용서하고픈 1g의 마음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사과는 면죄부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그 출발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어린이기 때문이다. 인수분해를 배우지 않은 아이에게 2차방정식을 풀어 내라고 요구할 수 없듯이, 자신의 잘못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는 과정이 먼저 교육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 가르치는 거다. 그렇기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 사과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자기가 했노라고 솔직히 말하는 어린이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고 용서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묻노니, 그대는 아직 교육이 필요한 아이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언행에 책임을 질 의지와 능력을 가진 성인인가?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버젓이 이글루스에 등록한 것으로 보아 법적으로는 성인의 연령인 듯 한데, 부디 그 행동과 생각의 수준 또한 성인의 단계가 되기를 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니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후 타인의 성향과 생각을 비난하는데 있어 그렇게 추호의 의심도 없거들랑, 먼저 스스로를 다수의 십자포화 앞에 당당히 내어 놓는 모범부터 보여라. 당신이 보여준 타인을 향한 매도는 지금 당신이 입은 따스한 외투를 향한 물벼락과 같다는 것을 알아라. 타인의 인권을 유린한 자는 그 인권을 존중받을 수 없듯이, 다양성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유일한 자는 타인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임을 명심하라. 타인을 빨갱이라 매도하는 것은 허용되고 당신은 타인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세 - 이는 비열하고 비겁하며 비루하다.


이 글이 당사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한다. 하지만, 씨바~ 이딴 소리 들으면서 내가 여기 붙어있어야 하나~ 내가 그렇게 죽을 죄를 지었나~ 샹그냥나도여기뜨고말란다~ 따위의 생각/행동을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전혀 뉘우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신의 손으로 증명하는 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경고다. 듣기는 싫겠지만.


p.s)
이 글 전체에는 단 한자의 욕설도 쓰이지 않았다.
이 글을 지울 생각은 없으며, 지울거면 애초에 쓰지 않는 것이 나의 룰이다.

단지 하나 두려운 것은,
충분한 연배인 주인장 분이 어린애 가르쳐 주듯 인덕을 베푼 일에 대해
내가 분개함으로써 그 덕망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랬기에 이사가 진행 중일 땐 입다물고 묵묵히 있다가
주인장 떠난 빈방을 본 지금에서야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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