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지나온 것들

국민학교 시절. 말 안듣는 아이들을 선생님이 꾸짖다 못해 택하는 벌이 몇가지 있었습니다. 반성문은 그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그 중에 가장 강력-_-한 것은 '부모님 모시고 오너라'였지요. 화내지도 않고 하는 이 말 만큼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언제나 시간은 방과 후. 다른 아이들이 안녕히 계세요~ 라면서 가방을 메고 우루루루 도망갈 때, 남아야 하는 사실에 시무룩한 얼굴로 선생님 책상 옆에 서 있는 녀석 몇. 일부러 느릿느릿 일과를 정리한 선생님은 더욱 더 느릿느릿 책상으로 돌아와서는 시무룩하게 서 있는 녀석 서너명에게 시커머죽죽한 종이를 한 장씩 안겨줍니다. 그러고선 한마디 : '앞 뒤로 빼곡히 적어라. 다 적으면 집에 가도 좋다. 대신, 글자가 지나치게 크거나 이상하게 적으면 한 장 새로 줄테다.' 그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스스로의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서너 명의 꼬마들은 서로 먼저 갈세라 너도나도 그 종이를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써대기 시작합니다. 죄송합니다-미안하다의 높임말은 이럴 때만 쓰더군요-만 빼곡히 채우기 시작하는 녀석이 있질 않나.

Hellkite는 어렸을 때부터 반성문을 쓰는 게 제일 싫었습니다. 차라리 대여섯대 맞고 끝내는 게 편했습니다. 왜냐면, 위의 그 녀석처럼 죄송합니다만 빼곡히 채우는 건 반성을 하고 있다는 표시라고 생각하지를 않아서였고, 정작 고사리 손에 쥐어진 연필로 그 넓디넓은 종이 대체 무슨 말을 채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정말 스스로가 '잘못했다'고 느끼지 않는 문제들 -예를 들어, 친구와 싸움을 하거나, 아니면 숙제를 안해오거나, 준비물을 안가져오거나.-에 대해서 '반성'하라는 강요는 받아 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정말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는 무엇을 잘못했으며 어떻게 뉘우치고 있다는 내용을 소상하고 자세하게 적어나가면 반성문을 쓰는 것이야 간단하지만, 정작 Hellkite의 온전한 잘못이 아닌 그저 사소한 잊어버림이나 실수 - Hellkite에 의해 정작 피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일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급우와 심하게 싸우는 경우는 오로지 상대가 잘못이 심했다고 판단해서 싸우는 경우 뿐이었는데 그에 대해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해라- 고 하면, 반성할 게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국민학교 몇학년이었던가에는 반성문을 써내라는 벌에 그 종이 한가득 Hellkite가 잘못하지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가득히 적어서 낸 적이 있습니다. 아니, 되려 종이가 모자라서 두 장인가를 더 달라고 해서 썼군요. 그때 그 '반성문'을 받아보신 선생님의 반응은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대로,

"이걸 지금 반성문이라고 썼냐?"

"제가 뭘 반성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 반성해야 할 게 없어서 이렇게 썼습니다."

한참을 Hellkite의 얼굴과 종이를 번갈아 보시더니 집에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제일 마지막으로 집에 간 것이지만요.


하지만, 벌로서 반성문을 써야 했던 경험이 Hellkite에게 나쁘게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을 때, 미안함을 전하는 수단 중에 '글'이란 것이 상당히 정중하고도 오해가 적은 수단이 된다는 것을 어릴 때의 경험으로 배웠다고 할까요. "미안합니다. 하지만.."이라는 말은 듣는 이에게 '아니 이 사람이 진짜 미안해 하는 건가?'라는 반발심을 발칵 불러 일으키지만, 글은 그 마지막 끝을 맺기 전까지는 읽는 사람에게 기다림의 여유를 주기 때문이지요. 왜, 삼국지 같은 곳에서 남을 도발하기 위해 쓰인 격문을 읽는 당사자조차도, 다 읽고 나서야 피를 토하고 쓰러지지 않습니까. (...어라 예가 조금?;) 상대에게 사과하는 마음과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설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미안해한다- 라는 '글'은 지금까지 살면서 Hellkite의 잘못을 많은 부분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말에 비해 글이 가지는 무거움을 비교적 어린나이에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뭐. 반성문의 덕이라면 덕입니다.


얼마전, 자주 들리는 커뮤니티에서 15살 중학생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과의 의미를 전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내도록 그 당사자는 나타나지 않았지요. 기다리다 지친 중학생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제게 묻더군요. 그래서 사과문을 커뮤티니에 게시하라- 고 충고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음? 글을 왜 써야 하는데요?"

"....혹시 초등학교 다닐때 반성문 안 써보셨어요?"

"그런거 안해봤는데요."

"....."
"....."
"....."
(몇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보인 반응)

...요즘은 국민초등학교에서 반성문쓰기 같은 건 벌로도 취급안하나 봅니다. :(


글은 말보다 무겁습니다. 비록 말과는 달리 뱉은 글은 고칠 수 있지만, 그럼으로써 더욱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골라 가장 적은 오해를 거쳐서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매체입니다. 진지해야 할 때는 말보다 글이 나은 소통의 수단이 되겠지요.

아, 그 중학생분은 사과문을 게시했고, 당사자분도 너그러이 그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올레.

덧글

  • ホウキボシ 2004/09/08 23:14 # 답글

    반성문이라...저는 국민학교 시절 그야말로 "어른의 사정"에 의한 폭력을 직접 겪어본 탓에. 굴복하는 버릇이 들어버려서 큰일입니다;
  • Aokizz 2004/09/09 06:24 # 삭제 답글

    ..과연. 반성문이라는 벌에는 그러한 심모원려가 숨어있었던 것이로군요[...]
    뭐, 저는 대부분의 경우 '죄송합니다'가 빼곡히 적힌 깜지쪽을 택했지만말입니다..; (하도 밥먹듯이 쓰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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