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지나온 것들

제일 무서운 것은 존재다. 있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 무슨 짓을 어떻게 해도 거기에 그대로 계셔주시는 것. 들. 속도가 빠르다보면 있었던 것을 채 보지 못한채로 지나치기는 하지만, 그 지나침은 있던 것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내가 보지 못했다 하여, 느끼지 못했다 하여, 잊었다 하여, 있었던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밤이 다가와 저 산 뒤로 태양이 숨었다 하여 태양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 그대로 있다.

나는 네게 무엇을 건네고, 너는 내게 무엇을 건넨다. 서로의 건넴에 이유는 없을지 모르며, 또한 그 건넴은 실제로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의미한 것들조차 가벼이 흘려넘길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말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잊고서 지내는 무엇인가가, 의도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그 무의미들을 통해서 번져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무의미한 것들은 진짜로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되지 못한다. 서로의 기억을 교환할 수 없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공유는 가능할지 몰라도, 기억을 교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같은 과거를 가진다하여 반드시 다음으로 향하는 동일한 행보를 취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 시작의 차이 몇 도가 무한대를 만들고 그것이 지금 나와 네가 가진 이마안큼의 거리다. 만남과 교류를 통해 많은 접점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접점으로부터 향하는 서로의 직선은 언제나 처음의 각도를 유지한다. 변한다는 것은 거기에 있다.

참으로 접속사가 인색한 문장들이오마는, 나와 너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너도 그리고 나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다. 잊었다- 는 선고는 거짓말이다. 내가 사라지지 않으면, 설마 네가 사라지더라도, 나는 잊지 못한다. 의식하고 있는 표면에 떠올라 있는 우선순위 차트에서 모습을 감추었다지만 그 모든 우선순위가 사라지는 시점에 다다르면, 자연스럽게 '잊었던' 것들은 그 표면으로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들, 처음과 그다지 다를바 없는 썩지도 않는 물귀신 같은 모습으로 눈 앞에 그렇게 있는다.

넓디 넓은, 지구보다도 넓은 세상의 면적위에 저마다의 좌표와 벡터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수많은 존재들. 그 중에 너. 그 중에 나. 사라졌을리가.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잊어버렸을리가 없잖아. 내가 잡아먹어서 지금의 나를 이룬 수많은 단백질과 탄수화물들처럼, 내가 결코 제대로 써먹지 못했던 'Vector'라는 녀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히 이해하고 있는 지금처럼, 과거는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그 과거의 주검위에 서있다. 현재처럼, 과거를 먹고서 나는 현재의 좌표위에 미래를 향하는 벡터로서 세상이라는 평면 위에 서 있는데.

말하지 못하는 무엇. 밖으로 꺼집어 낼 수 없는 그 무엇. 내 존재의 영역을 벗어나버리면 죽을 것만 같은(그것이든 나든) 그 무엇. 있다는 증명을 위해 누구를 죽일 필요가 있나? 대답하지 않겠다. 하지만 적어도, '있다'는 것은 너와 내가 가지는 수많은 차이를 디디고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점이다. 너와 내가 살아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단순명료한 진실처럼. 갑자기라는 것은 없다. 뜬금없이라는 것도 없다. 의외라는 것도 어쩌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이미 깊은 속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있어왔을테니까.

나. 너. 그리고 세상.
지금 이곳에 있어. 정신차려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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